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폴란드 침공 (문단 편집) == 뒷이야기 == * 히틀러를 포함한 독일 수뇌부는 영국과 프랑스가 참전을 할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못했다. 결국 9월 3일, 양국의 선전포고를 전달받은 히틀러 포함 독일 수뇌부는 망연자실한 채 "20년 만에 다시 패전의 길을 걷는가?" 라며 좌절했다. [[뮌헨 협정]] 파기를 묵인했기 때문에 폴란드도 봐 줄 거라 예상했지만, 영프의 반전 여론은 뮌헨 협정 파기 후 사라졌고 폴란드 침공 때 참전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따라서 히틀러의 오판. 이 부분은 [[프랑스 침공]] 항목 참고.[* 독일계의 숫자는 폴란드보다 체코슬로바키아가 훨씬 많았다. 그러나, 독일이 애초에 폴란드에게 요구한 영토들을 보면 독일계의 숫자가 적지 않았다. 논쟁의 핵심이었던 단치히(그단스크)같은 경우 독일계의 구성이 90%가 넘어갔고, 단치히(폴란드) 회랑같은 경우 말이 폴란드 회랑이지 오랜 프로이센 영토로써 독일계(40%)와 폴란드계의 비율이 비등했다. 이렇다 보니까 단치히 자유시 같은 경우 폴란드 영토인데도 불구하고, 나치 독일에 합병되기 전까지 연거푸 지역 독일민족주의 정당들이 압도적으로 선거를 이기는 상황이었다. 이것은 협상국이 1차대전 이후에 민족구성을 고려하지 않은채 독일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무리하게 이 지역을 폴란드에게 할양한 결과로, 폴란드 회랑의 지역들의 독일계 비율은 1921년 18.8%까지 떨어진다. 이렇다 보니까 독일 입장에서는 독일계 숫자가 우세하거나 우세했던 단치히, 폴란드 회랑, 상부 실롱스크 같은 지역들은 당파를 불문하고 당연히 독일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 알짜배기 지역들을 잃어버리면 안 되는 폴란드 입장에서는 단호한 입장을 견지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폴란드가 비판받아야 할 점은 뮌헨 협정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분할에 참여한 것이다. 당시 수준급의 선진국이자 공업국으로 강력하고 훌륭하게 무장한 체코슬로바키아의 육군은 대(對)독일전에 있어 폴란드 및 영국과 프랑스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폴란드는 과거에 체코슬로바키아에 강탈당한 치에신 지방을 돌려받고 싶어 영국과 프랑스에게 배신당한 체코슬로바키아를 버리고 [[순망치한|오히려 체코슬로바키아의 분할에 동참]]해 해당 지역을 다시 먹어버렸다. 이런 폴란드의 영토 욕심은 주변국들의 어그로를 너무 끌었다.] 사실 히틀러와 독일 수뇌부의 망상은 누가 봐도 말도 안되는데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는 소국에 영토도 작지만 그래도 폴란드는 앞서 독일에 먹힌 두 나라보다야 나은 편이며 시기도 대독일 포위망을 형성했던 국가들 중에 폴란드와 프랑스 둘만 남았다. 더군다나 이런저런 일로 히틀러는 오늘날로 치면 신용불량자가 된 상태. 히틀러는 영국, 프랑스 등도 속는 것도 한두번이지 맨날 속아주면 나중에는 더 큰 욕심을 부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거라는 생각도 못해본 모양이다. * 프랑스가 폴란드보다 1주일이나 더 버텼으니 '폴란드는 프랑스만큼 강력했다!'는 폴란드 옹호론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폴란드가 프랑스만큼 강했다는 것은 아니고 말 그대로 마지막 1인까지 절망적인 저항을 벌였던 점을 높이 산 것이다. 프랑스는 폴란드보다 훨씬 강력하고 중무장한 국가였다. 차라리 폴란드가 더 잘 싸웠다고 말한다면 모를까,[* 폴란드의 경우는 국경이나 지형 자체가 국토 방어에 매우 불리하게 되어 있었다. 위에서 말했듯이 폴란드와 독일의 국경선은 폴란드의 핵심 지역을 둘러싼 형태였다. 여기에 소련의 침공까지 받았는데 그럼에도 프랑스와 비슷하게 버텼으니...] 폴란드가 프랑스 수준이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프랑스는 [[프랑스 침공]] 당시 낫질 작전에 당했으면서도 아직 '''100만 이상의 병력'''이 멀쩡히 남은 상태에서 핵심 주력 부대의 소멸과 수도 방어 불가 등이 겹치면서 조기에 항복한 경우이니 감투 정신을 비교할 수는 있으나 직접적으로 강약을 비교할 수는 없다. 물론 그 100만명이 남아 있었지만 결국 역사에 영원히 남을 6주 업적을 달성했다. * 만약 프랑스가 폴란드처럼 결사 항전으로 나왔으면 전쟁은 몇 달을 끌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다만 이 경우에도 1939년의 독일군과 1940년의 독일군이 전력 면에서 '''체급이 달랐음'''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1939년 10월부터 1940년 5월까지 독일군의 중(中)/중(重)전차 보유대수 현황에서 [[3호 전차]]는 151대에서 785대로, [[4호 전차]]는 143대에서 290대로, 체코제 전차([[LT vz. 35]]+[[LT vz. 38]] 합산)는 247대에서 381대로 늘어나 있었다. 이 중 실제로 부대에 배치된 전차 숫자는 이보다 적었지만, 그래도 1939년의 독일군과 1940년의 독일군은 질적으로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칼 하인츠 프리저, [[전격전의 전설]], p.65~66] 실제 군부 내 소장파들은 항복 불가, 철저한 저항전을 주장했으나, 서전의 패배로 인해 지상군 1/3이 그대로 소멸되고 나머지 1/3이 [[마지노 선]]에 묶이자 그것으로 사실상 패전이 확정된 것이라 여겨 넋이 나간 우파 정권과 군 상층부는 항복을 결정했다. 이후 영국으로 망명한 항전파 장교들을 [[샤를 드골]]이 결집해서 [[자유 프랑스]]를 만들었다.[* 그렇다고 프랑스가 잘 싸웠다는 건 더더욱 아니다. 애초에 폴란드는 홀로 독일과 힘겹게 전쟁하다가 소련이 동쪽을 가격하여 패배가 더욱 가속화된 것이지만, 프랑스의 경우는 베네룩스, 영국과 함께 싸웠음에도 6주만에 나치 독일에게 털리는 역사적 참패를 당했다([[이탈리아 왕국]]은 독일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고). 그리고 1939년과 1940년의 독일군이 질적으로 서로 달랐다 하더라도 독일군은 폴란드군에 비해 군사력 면에서 우위에 있었지만, 프랑스는 그런 것도 아니었다.] * 전쟁 직전(1938-39년) 폴란드가 주변국을 상대로 벌인 외교정책은 엄청난 실책으로 두고두고 회자된다. 애초에 폴란드는 제1, 2차 세계 대전 사이 폴란드가 아직 신생국일 때, 접경국 중 [[라트비아]]와 [[루마니아 왕국]], [[벨라루스 인민 공화국]]을 제외하고 전쟁을 치루지 않은 나라가 없었을 정도로 주변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독일과 소련은 워낙 강대국이어서 외교관계를 개선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했지만, 국력이 동급이었던 체코슬로바키아와 훨씬 뒤떨어졌던 리투아니아 상대로는 지나치게 고압적으로 대했다. 자세히 말하자면 독일과 소련을 상대로는 각각 1934년, 1932년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여 관계를 그나마 개선했지만 리투아니아와 체코슬로바키아와는 전간기 내내 외교관계조차 수립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 상태에서 1938년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위협하자 폴란드는 [[뮌헨 협정]] 때 체코 분할에 가담하여 자기들과 함께 독일에 맞서 싸울 수도 있었던 강소국 체코슬로바키아를 무너뜨려 버렸다. 결과적으로 독일은 더 강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쪽 국경을 훤히 노출하게 되었다. 이후 1939년 독일의 위협에 맞서 영국, 프랑스와 소련이 군사 동맹을 모색할 때 '''차라리 나라가 망하고 말지'''라면서 끝내 소련군의 지원을 거부하기도 했다. 다만 폴란드는 영국, 프랑스와 미리 동맹을 맺어두었으므로 설마 독일에게 침공당해 나라가 망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전쟁이 터지기 전인 1939년까지 폴란드는 단치히 문제에 대해서 여전히 독일과 대화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 서양 지식인, 그리고 이들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사회주의 좌파 지식인들에겐 악몽 같은 사건이다. 스페인 내전과 달리 파시즘(나치 독일)과 공산주의(소련의 스탈린주의)가 [[배신|연합했으니]] 파시즘에 맞서 싸우던 지식인들의 [[틀렸어 이젠 꿈도 희망도 없어|입장에선...]] 사실 이런 조짐은 [[스페인 내전]] 당시 스탈린주의자들의 정치질과 그 외의 사회주의 분파와 의용군을 향한 숙청, 그리고 이들을 [[굴라크]]에 가둔 소련의 행태로 예고된 참사였다. 이것을 경고해온 지식인이자 스페인 내전 참전자가 "동물 농장"으로 유명한 [[조지 오웰]]. * [[일본 제국]]에서는 [[추축국]]이긴 하지만 폴란드 침공이 벌어지자 [[아베 노부유키]] [[일본 총리]]가 앞장서서 [[나치 독일]]을 거세게 비난했다. [[만주국]]을 국가로 인정했던 [[폴란드 제2공화국]]은 일본에 매우 우호적인 우방국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기 전까지 폴란드 제2공화국을 [[추축국]]에 끌어들이려고 엄청나게 노력했다. 그러나 히틀러의 [[독소 불가침조약]], 곧바로 이어진 폴란드 침공으로 일본의 계획이 틀어지자 일본은 히틀러를 비난한 것이다. 일본은 일본 국내에 있던 폴란드 대사관을 온전히 보존하고, [[태평양 전쟁]] 이전까지 [[폴란드 망명정부]]에 대해 계속 금전적인 지원을 했다고 한다. [[독소전쟁]] 발발 후 히틀러의 기대와 달리, 일본이 소련을 치지 않은 것도 폴란드 침공으로 독일이 일본한테 [[뒤통수]]를 날린 것이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도 있다. [[1941년]] 연말 [[태평양 전쟁]]을 일본이 일으키자 폴란드 망명정부는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는데, 일본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대 일본 선전포고는 [[영국]]의 강요로 인한 것"이라고 간주하여 선전포고를 인정하지 않았다. 폴란드 망명정부 역시 형식적인 선전포고 이후 일본 제국과 [[1945년]] [[9월 9일]]까지 별다른 전투 행위를 하지 않았다. * 대체역사 소설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에서는 폴란드를 침공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국경지대 방송국에 폴란드군으로 위장해 잡입하여 선전포고 자작극을 벌이려던 SS 단원들을 주인공의 언질을 받은 국방군 병력들이 제지하는 것으로 나온다. 이후 주인공은 이것을 '평화를 주장한다던 나치가 독일을 다시 대전쟁의 위험에 빠트리려는 자작극을 벌였다'며 내전중 여론전에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한편 폴란드 국경에서 벌어진 국방군과 SS 간의 충돌은 독일 내전 이후 신생 독일 제4제국을 폴란드가 역으로 침공하는 명분이 되었다. 저 세계에서는 폴란드 침공이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아니라 '폴란드의 독일 침공(...)'이 된 셈. 이후 독일이 폴란드에 내전을 일으켜 폴란드의 정권을 엎은 후 독일의 동맹으로 만들어 폴란드를 소련에 맞서는 방벽으로 활용했다. * 대전략게임 [[Hearts of Iron IV]]에서 독일은 폴란드에게 단치히를 줄 것을 무력으로 요구하고 거부할 시 전쟁을 때리거나(역사적 AI의 경우 반드시 반대), 한 발짝 물러나서 체코 합병 후 괴뢰국이 된 슬로바키아 땅을 줄 테니 단치히 회랑을 달라고 등가교환을 요구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